그림 이야기

간송미술관,겸재 서거 250주년기념 겸재화파전

웰트렉 2009. 5. 28. 12:11

 

나는 아카시아꽃 향기를 맡으면...

돌아가신 아버지와 간송미술관이 생각난다.

늘 이맘때가 되면,그 향기를 맡으며 고속도로를 달려 선친 생신을 맞아 흩어졌던 가족들이

고향집에 모여 맛있는 음식과함께 정담을 나눴으며,

정겨운 간송미술관 봄전시회를 찾았기 때문이다.

 

미술관 외양은 소박하지만 소장 작품의 명성과 가치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국보급의 작품 한점 한점을 모은 간송 전형필선생님의 정성과 안목은 하늘이 내려준 복이고,

그림을 통하여 민족혼을 살리고 애국정신이 무엇인지 후손들에게 일깨워준다.

그 분의 유지를 받들어 일년에 두번 무료로 감상하는 행운을 우리는 누리고 있는  것이다.

 

오늘도  많은 겸재의 황홀한 그림을 감상하고 미술관을 나서니,

소탈하게 꿈며진 너른 정원의 푸르른 나뭇잎들이 하늘거리며 나부끼는데

어디선가 아카시아꽃 향기가 따스한 봄바람에 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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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송미술관. 작고 낡았어도 국내 최고 사립미술관 중 하나다. (소장품이 장난 아니다!) 일년에 단 두번 정기 전시회를 하는데 작년 가을 전시는 혜원 신윤복 전시로 더 많이 알려지기도 했다. 사람들은 엄청 몰렸는데 미술관 측도 몇명이나 왔는지 집계를 못 한다고 했다.
아무튼 매년 봄과 가을, 어떤 전시를 선보일지 기다려지는 간송미술관이 올해는 겸재 정선을 주제로 삼았다. 올해는 겸재 정선 탄생 333주년이자 서거 250주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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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세 때 그린 '금강내산'>

 
 올해는 겸재 정선(1676∼1759)이 서거한 지 250주년이 되는 해이다.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은 봄 정기 전시회에서 겸재 정선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전시를 선보인다.

 국보급 미술품을 다수 소장하고 있는 간송미술관은 일 년에 단 두 번(5월과 10월) 각각 보름간만 일반에 공개한다. 매번 겸재, 단원, 혜원 등 조선시대 명품 미술품이 공개되기 때문에 간송미술관 전시는 언제나 큰 주목을 받는다.

 중요 미술품을 수집해 미술관을 세운 간송 전형필은 특히 겸재 그림을 집중적으로 수집했다. 간송미술관에서 처음 열린 전시 역시 겸재 전시였다. 간송미술관은 1971년 가을 제1회 전시회에서 겸재전을 연 데 이어 1981년 진경산수화전, 1985년 진경시대전, 1988년 진경풍속전, 1993년 겸재진경산수화전, 2004년 66회 대겸재전 등 모두 6차례 전시를 열었다. 또 첫 전시 이후 겸재 연구를 시작해 매 전시 때마다 겸재 연구 결과를 발표해왔다. 40여년간 겸재를 연구해온 최완수 연구실장은 올해 하반기 겸재의 일대기와 작품 세계를 다룬 평전을 출간할 예정이다. 이번 연구에서는 겸재가 41세 때 첫 벼슬로 관상감 천문학 겸교수(종6품)에 올랐다는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이번 감송미술관 76회 정기 전시는 겸재 서거 250주년을 맞아 겸재 전시와 연구결과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자리다. 이름은 ‘겸재 서거 250주년 겸재 화파전’이다.

 겸재는 동양화의 양대 기법이라고 할 수 있는 필법과 묵법에 정통해 필묵을 한 화면에 이상적으로 조화시키는 방법으로 진경산수화법을 창안했다. 최 실장은 “암산절벽은 필법으로 처리하고 숲이 우거진 토산수림은 묵법으로 처리했다”며 “여기에 토산수림이 암산절벽을 감싸서 음양조화를 이루게 하거나 토산과 암산이 마주보게 해 음양대비를 이루게 하는 화면구성법을 구사했다”고 설명했다. 겸재는 ‘주역’에 밝아 음양조화와 음양대비의 원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최 실장은 “‘주역’과 필법 모두 중국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를 한꺼번에 적용시킨 사람은 중국에서조차 없었기 때문에 당시 겸재 그림은 중국에서도 인기였다”고 설명했다.

 36세 때 금강산을 처음 여행한 겸재는 금강산의 빼어난 풍경을 그린 21폭의 ‘해악전신첩’을 그렸다. 이어 72세 때 다시 한번 금강산의 황홀한 경치를 그리기로 마음먹고 ‘해악전신첩’을 다시 꾸며냈다. 젊은 시절 그린 ‘해악전신첩’(일명 ‘신묘년풍악도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 패기 넘치는 젊은 작가의 작품답게 필법이 날카롭고 묵법이 엄정하다면, 72세 때 그린 ‘해악전신첩’은 노대가의 그림답게 달관과 확신으로 가득차 필법은 부드럽게 세련되고 묵법은 거침없다. 하지만 필묵 사용의 기본 정신과 음양 조화의 화면 구성 원칙은 철저히 고수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겸재는 63세 이후 화법이 완성돼 진경 기법의 진면목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64세 때 그린 ‘청풍계’는 그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이어 겸재의 그림은 노년으로 갈수록 추상화 경향을 보인다. 80세에 그린 ‘사문탈사’ 등은 그림이 더욱 단순화, 추상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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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계>


겸재는 당시 상류층과 하층민 모두에게 인기였다. 당시에 겸재 그림이 안 걸린 집이 없을 정도였다. 최 실장은 “당시에도 겸재의 그림은 4∼5인 가족이 반년 먹을 농토값에 맞먹을 정도로 고가였지만 그 값이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겸재는 영조의 후원을 받았다. 그는 영조가 어렸을 때 사저에서 직접 그림을 가르치기도 했었다. 영조는 겸재를 평생 이름이 아닌 호 ‘겸재’로 불렀다. 최 실장은 “임금이 호를 부른다는 것은 스승에게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영조는 또 겸재가 65세 때 지금 서울 강서구의 양천현령으로 발령했다. 이 곳은 한강과 함께 삼각산, 북악산, 인왕산이 보이는 곳으로 겸재로 하여금 마음 놓고 한강 주변의 승경을 그리도록 한 배려였다. 겸재는 이 곳에 지내면서 한강 주변의 풍경을 그린 ‘경교명승첩’을 그려냈다.

 이번 전시에서는 금강산을 그린 ‘해악전신첩’, 한강 주변을 그린 ‘경교명승첩’, 관동팔경을 그린 ‘관동명승첩’, 또 말년의 초충도 등 겸재의 화풍을 아우르는 80여점이 내걸린다. 또 겸재 화풍을 계승한 후배 화가들의 그림도 함께 전시된다. 심사정, 김홍도, 김득신, 신윤복 등 유명 화가뿐만 아니라 겸재를 좋아해 이름까지 바꾼 김희겸 등의 그림이 선보인다. 최 실장은 “‘진경 시대’는 조선 숙종과 영정조 시절 125여년으로 볼 수 있는데 겸재는 숙종 2년에 태어나 84년을 살았다. 진경시대의 3분의 2를 살며 진경 시대의 절정을 이끌어 갔다”며 “겸재가 워낙 두각을 나타내 그 후신들이 빛을 발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최 실장은 또 “겸재 정선은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정확히 짚어내 표현했다”며 “우리나라 회화 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대화가로 화성(畵聖)의 칭호를 올려야 마땅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5월 17∼31일.

 

▶간송미술관[ 澗松美術館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사립 미술관. 1966년 전형필(全鎣弼)의 수집품을 바탕으로 하여 한국민족미술연구소(韓國民族美術硏究所) 부설 미술관으로 발족하였다. 전형필은 1929년부터 우리 나라의 전적 및 고미술품을 수집하기 시작하여 서화·도자기·불상 등의 미술품과 국학 자료를 확보한 뒤 1936년 지금의 미술관 건물인 보화각(寶華閣)을 지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및 8·15 광복, 6·25전쟁 등을 겪으며 일반 공개를 위한 미술관은 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업은 아들인 성우(晟雨)·영우(暎雨)에게 이어져 1965년 가을부터 한국 고미술품 및 전적의 정리 작업을 시작, ≪고간송전형필수집서화목록 故澗松全鎣弼蒐集書畵目錄≫ 상·하권을 간행하였고, 1967년에는 수만 권의 도서 중 2천여 질의 한적(漢籍)을 정리하여 ≪간송문고한적목록 澗松文庫漢籍目錄≫을 간행하였다.

이 정리 작업을 준비, 진행시키며 한국민족미술연구소 및 간송미술관이 1966년에 발족하였다. 미술관은 연구소의 부설 기관 형식으로 되어 있어 미술관은 미술품의 보전·전시 업무를, 연구소는 이를 바탕으로 한 연구 사업을 맡고 있다.

미술관의 규모는 1층과 2층의 전시실을 가지고 있으며 소장품은 전적·고려청자·조선백자·불상·그림·글씨·부도·석탑 등에 걸쳐 다양하다. 그중 ≪훈민정음≫(국보 제70호)을 비롯하여 10여 점이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많은 유물들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전시 활동으로는 1971년의 개관 전시회 ‘겸재전(謙齋展)’을 시작으로 해마다 봄·가을에 한 번씩 수장품전을 여는 동시에 전시회와 함께 논문집 ≪간송문화 澗松文華≫를 발간하고 있는데, 2000년 현재 57호가 발간되었다.

전시회는 회화·서예·도예·서화로 분류, 개최하며 일반 공개는 봄·가을의 정기 전시회 이외의 상설 전시는 하지 않는다. 이제까지 30여 회의 전시회를 통하여 약 1천점의 수장품이 일반에게 공개되었는데, 최근(2000년 10월)에는 ‘단원-혜원특별전’을 개최하였다. 또한 수장품들을 모아 ≪혜원전신첩 蕙園傳神帖≫·≪추사명품첩 秋史名品帖≫·≪겸재명품첩 謙齋名品帖≫ 등을 편찬하였다.

≪참고문헌≫ 澗松文華 1∼32집(한국민족미술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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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사회시설 > 문화시설 > 미술관


  ▶전형필[ 全鎣弼 ]


1906∼1962. 문화재 수집가. 본관은 정선(旌善). 자는 천뢰(天賚), 호는 간송(澗松)·지산(芝山)·취설재(翠雪齋)·옥정연재(玉井硏齋). 서울 출생. 중군(中軍, 西班, 정3품) 계훈(啓勳)의 증손으로, 내부주사(內部主事) 및 참서관(參書官)을 지낸 명기(命基)의 아들이다. 증조 때부터 배우개(지금의 종로4가) 중심의 종로 일대의 상권을 장악한 10만 석 부호가의 상속권자였다.

휘문고등보통학교(徽文高等普通學校)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법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에 일제의 식민 통치 아래 말살되어 가는 민족정기를 되살리기 위하여 우리 민족 문화 전통을 단절시키지 말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민족 문화의 결정체인 미술품을 인멸되지 않게 한 곳에 모아 보호하여야 한다는 비장한 각오로 오세창(吳世昌)을 따라다니며 민족 문화재 수집 보호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사이에 그는 민족의식이 투철하고 서화에 일가를 이룬 오세창의 측근 문사들과 교유를 가졌다. 권동진(權東鎭)·민형식(閔衡植)·고희동(高羲東)·지운영(池雲英) 등의 전배(前輩)들과 이상범(李象範)·노수현(盧壽鉉)·이마동(李馬銅)·김영랑(金永郎) 등의 동년배들이 그들이다. 이들과의 교유 속에서 그의 탁월한 예술 감각은 자신의 서화 자체를 가경(佳境)에 이르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감식안을 청람(靑覽)의 경지로 향상시켜 놓았다.

또한 심사정(沈師正)·김홍도(金弘道)·장승업(張承業) 등 조선시대 전반에 걸친 화적은 물론, 서예 작품까지 총망라하였고, 고려 및 조선 자기와 불상·불구·와전 등에 이르는 문화재들을 방대하게 수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우리 미술사 연구를 위한 인접 자료인 중국 역대 미술품을 수집하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문헌 자료의 구비를 위하여 1940년부터는 관훈동 소재 한남서림(翰南書林)을 후원, 경영하면서 문화사 연구에 필요한 전적을 수집하여 한적(漢籍)으로 1만 권의 장서를 이루어놓았다. 그리고 당시 국내외에서 발간되는 문화사 관계 서적들도 가능한 한 수집하여 장차 연구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인재 양성이 또 하나의 절실한 문제임을 통감하고 1940년 6월 재단법인 동성학원(東成學園)을 설립하여 재정난에 허덕이는 보성고등보통학교(普成高等普通學校)를 인수하여 육영 사업에 착수하였다.

광복 후에는 잠시 보성중학교장직을 역임하기도 하고(1945.10.∼1646.10.), 문화재보존위원회 제1분과위원에 피촉(被囑)되기도 하였으나(1954년), 항상 공직에 나가는 것을 피하고 시은(市隱)을 자처하였다. 1960년 김상기(金庠基)·김원룡(金元龍)·진홍섭(秦弘燮)·최순우(崔淳雨)·황수영(黃壽永) 등과 같이 고고미술동인회(考古美術同人會)를 발기하여 운영의 핵심을 담당하면서 1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1962년 1월에 죽자, 그해 8월 15일 대한민국문화포장이 추서되고, 1964년 대한민국문화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그 뒤 그의 자제와 동학들이 북단장에 한국민족미술연구소(韓國民族美術硏究所)를 설립하고 그가 마련해 놓은 연구 자료를 토대로 미술사 연구를 활발하게 진행해 감으로써 그 유지를 계승하고 있다. 보화각은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으로 개칭되어 연구소에 부속되어 있다.

≪참고문헌≫ 旌善全氏總譜
≪참고문헌≫ 澗松先生의 逝去를 哀悼한다(考古美術同人會, 考古美術 19·20, 1962)
≪참고문헌≫ 澗松文華 1(韓國民族美術硏究所, 1972)

 

*** 겸재(謙齋) 정선(鄭歚) ***

 

생몰년 : 1676-1759 시대 : 조선 분야 : 예술/체육 > 화가 > 화가 정선(鄭歚)에 대하여
정선(鄭歚)
1676(숙종 2)∼1759(영조 35). 조선 후기의 화가.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원백(元伯), 호는 겸재(謙齋)·겸초(兼艸)·난곡(蘭谷).

 

1. 가계
아버지는 시익(時翊)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이다.
2남 1녀 중 맏아들이다. 그의 선세(先世)는 전라남도 광산·나주 지방에서 세거한 사대부 집안이었다.
뒤에 경기도 광주로 옮기고, 고조부 연(演)때 서울 서쪽〔西郊〕으로 다시 옮겨 살기 시작하였다.1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늙은어머니를 모시게 되었다.

 

2. 관직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하며 그뒤 김창집(金昌集)의 도움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위수(衛率:王世子를 따라 호위하는 직책)라는 벼슬을 비롯하여, 1729년에 한성부주부, 1734년 청하현감을 지냈으며, 또 자연·하양의 현감을 거쳐 1740년경에는 훈련도감랑청(訓練都監郎廳), 1740년 12월부터 1745년 1월까지는 양천의 현령을 지냈다.
그뒤 약 10년 동안은 활동이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1754년에 사도시첨정(司䆃寺僉正), 1755년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그리고 1756년에는 화가로서는 파격적인 가선대부지중추부사(嘉善大夫知中樞府事)라는 종2품에 제수되기까지 하였다.

 

3. 화업수련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었다는 기록과 현재 남아 있는 30세 전후의 금강산그림 등을 통하여 젊었을 때 화가로서 활동한 것이 확실하지만, 40세 이전의 확실한 경력을 입증할만한 작품이나 생활기록자료는 없다.
그가 중인(中人)들이 일하고 있었던 도화서화원(圖畵署畵員)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그의 집안은 원래 사대부출신으로 신분상의 중인은 아니며 몇 대에 걸쳐 과거를 통하여 출세하지 못한 한미한 양반이었으나 그의 뛰어난 그림재주 때문에 관료로 추천을 받았으며 마침내 화단에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지금까지 막연한 중국의 자연을 소재로 하던 시나 문학의 영향에서 이루어진 산수화의 화제(畵題)는 빛을 잃고, 대신 우리 자연으로 대치하게 되는 시기에 태어난 그는 마침 중국에서 밀려들어오는 남종화법(南宗畵法)이나 오파(吳派)와 같은 새로운 산수화기법에 접하게 되고, 또 당시 다시 유행하게 된 시서화일체사상을 중시하던 문인들 사이에 참여하여 자신의 교양을 높이거나 창작하는 계기를 얻게 되었다.
특히, 이병연(李秉淵)같은 시인과의 교우를 통하여 자기 회화세계에 대한 창의력을 넓히고 일상적 생활의 주제를 회화로 승화시킬 수 있는 자극을 받게 되었다.
우리나라 자연을 다룬 그의 화제들은 당시 기행문의 소재였던 금강산, 관동지방의 명승, 그리고 서울에서 남한강을 오르내리며 접할 수 있는 명소들과 그가 실제 지방수령으로 근무하던 여가에 묘사한 것들이다.
그밖에도 자기 집과 가까웠던 서울장안의 사철의 경치들, 특히 인왕산 동북 일대의 계곡과 산등성이들이 화제가 되었으며, 문인지우(文人知友)들과 관련되는 여러 곳의 명소나 특수한 고장들의 자연을 다루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사도(故事圖)같은 중국적 소재도 많이 다루고 있으며, 성리학자들의 고사도 제작에서 그의 관심거리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다.

 

4. 회화기법
회화기법상으로는 전통적 수묵화법(水墨畵法)이나 채색화(彩色畵)의 맥을 이어받기도 하지만 자기 나름대로의 필묵법(筆墨法)을 개발하는데, 이것은 자연미의 특성을 깊이 관찰한 결과이다.
예를 들면, 호암미술관(湖巖美術館)소장의 〈인왕제색도 仁王霽色圖〉에서는 인왕산의 둥근 바위봉우리 형태를 전연 새로운 기법으로 나타내는데, 바위의 중량감을 널찍한 쉬운 붓으로 여러번 짙은 먹을 칠하여 표현하며(積墨法), 또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의 〈통천문암도 通川門巖圖〉에서는 동해안 바위 구조를 굵직한 수직선으로 처리하여 세밀한 붓놀림이나 채색·명암 등 효과를 무시하면서도 물체의 외형적 특성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다.
또, 한가지 두드러진 붓쓰임의 예는 서울근교나 해금강은 물론 우리나라 도처에서 볼 수 있는 소나무의 묘사법인데, 몇 개의 짧은 횡선과 하나의 굵게 내려긋는 사선(斜線)으로 소나무의 생김새를 간략하면서도 들어맞게 그린다.
호암미술관 소장의 1734년작 〈금강전도 金剛全圖〉(130.7×95㎝)는 금강내산(金剛內山)을 하나의 큰 원형구도로 묶어서 그리는데, 이는 기법상 천하도(天下圖)라는 전통적인 지도제작기법에 근거하며, 금강내산을 한 떨기 연꽃 또는 한 묶음의 보석다발로 보는 종래의 자연묘사시에서 조형적 원리(造形的原理)를 따오는 기발한 착상이다.
우선, 원형을 대강 오른쪽의 골산(骨山:금강내산의 화강암바위로 된 삐쭉삐쭉한 모습)과 왼쪽의 토산(土山:금강내산의 수림이 자라는 둥근 묏부리)으로 구분하되, 골산은 예리한 윤곽선으로, 토산은 그의 독특한 침엽수법(針葉樹法)과 미점(米點)으로 묘사한다.
그다음 이 원형외곽을 엷은 청색으로 둘러 여타 공간을 생략함으로써 산 자체만을 돋보이게 한다. 골짜기마다 흐르는 물은 원의 중심이 되는 만폭동(萬瀑洞)에 일단 모이게 하여 구도상의 중심을 이룬 다음, 화면의 앞쪽으로 흘러 장안사비홍교(長安寺飛虹橋)를 지난다.
이 그림은 실제의 자연을 새로 해석하여 조형화한 좋은 예이며, 오른편 위쪽에 쓴 제시(題詩)의 내용과 형태가 일치한다.
그의 회화기법은 다른 화가들에 비하여 아주 다양하여 정밀묘사법에서부터 간결하고 활달한 사의화(寫意畵)까지 있어, 자연에서 얻은 인상을 나름대로 재구성하는 과감성과 회화의 원리를 발전시키는 등 여러 단계의 작품을 보여주는 가운데, 특히 우리 주위에서 친숙하게 대할 수 있는 구체적 자연을 특징짓는 기법이 독창적인 면이다.

 

5. 평가와 업적
이러한 그의 창의력은 그가 즐겨하였다는 역(易)의 변화에 대한 이해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림의 소재·기법 어느것에나 구애됨이 없이 소화하였으며, 심지어 지두화(指頭畵)까지도 실험하고 있다.
또한, 문인들과의 가까운 교류와 자신의 성리학에 대한 지식 등 중국 고전문학과 사상도 두루 섭렵하여 이들을 조형세계에 반영하고 있다.
특히, 이미 청나라 문인들 사이에서도 유행한 시화첩(詩畵帖)같은 것은 선비들간에 시짓고 그림그리기와 글씨쓰기놀이를 통하여 이루어지는데, 실경산수화를 다루는 경우에는 시인들과 함께 하는 여행에서 이루어질 때도 있다.
그는 이미 말한 노론의 명문인 안동김씨네와의 관계에서 관로(官路)에 진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선진적인 사상과 우수한 수장품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을 것이며, 그 중에서도 김창흡(金昌翕)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특정한 파벌에만 치우치지 않은 매우 폭넓은 교우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생애 후반의 계속적인 승진은 영조가 세제로 있을 때 위솔이라는 직책으로 있었기 때문에 입은 배려로 생각되며, 이것이 노년에도 창작에 전념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라고 하겠다.
그는 조선시대의 어느 화가보다 많은 작품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선비나 직업화가를 막론하고 크게 영향을 주어 겸재파화법(謙齋派畵法)이라 할 수 있는 한국실경산수화의 흐름을 적어도 19세기 초반까지 이어가게 하였다. 이들 중에는 강희언(姜熙彦)·김윤겸(金允謙)·최북(崔北)·김응환(金應煥)·김홍도(金弘道)·정수영(鄭遂榮)·김석신(金碩臣)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두 아들인 만교(萬僑)와 만수(萬遂)는 아버지의 가업을 잇지 못하고 손자인 황(榥)만이 할아버지의 화법을 이어받고 있다. 정선에 관한 기록은 어느 화가보다 많으며 작품수도 가장 많다.
그러나 그가 지었다는 《도설경해 圖說經解》라는 책과 유고(遺稿) 수십권은 전하지 않으며, 자작시나 화론(畵論)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그를 더 깊이 연구하는 데 아쉬움을 주고 있다.
또, 초년기의 작품이 거의 밝혀지지 않아 화가로서의 생애를 전부 조명하는 데 공백이 있다.

 



































◆간송에서 겸재를 만나다
(박제균 앵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5월 19일 동아 뉴스 스테이션입니다.
올해는 우리나라 회화 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화가로 꼽히는 겸재 정선의 서거 2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서울 성북동에 있는 간송미술관은 겸재와 그의 영향을 받은 화가들의 작품들을 모아 `겸재 서거 250주년 기념 겸재 화파 전`을 오는 31일까지 열고 있습니다.
(김현수 앵커) 겸재 화파 전은 해마다 봄과 가을에 2주일 동안만 문을 여는 간송미술관의 춘계전이란 점에서 큰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의 내용과 주목할 작품에 대해 편집국 고미석 전문기자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고 기자, 겸재는 어떤 화가였나요.
(고미석 기자) 겸재는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고유의 화법으로 그려내는 진경산수를 창안하고 절정기를 이끈 우리나라의 화성으로 평가됩니다. 그는 숙종 2년 1676년 서울의 사대부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명문가 출신이지만 가세가 기울면서 과거를 포기하고 그림의 길로 들어선 사대부 화가입니다. 산수 인물 화훼 초충 등 모든 종류의 그림을 잘 그렸지만 그중에서도 산수화 분야에서 최고의 이름을 떨칩니다. 겸재는 흙산과 암벽이 어우러진 우리의 산야를 표현하기 위해 북방화법의 특장인 필법과 남방화법의 특장인 묵법을 조화롭게 구사하는 방법을 창안했습니다. 또한 주역에 정통했던 그는 음양조화와 음양대비의 화면 구성을 시도해 중국에서도 명성이 높았습니다. 한 마디로, 겸재가 꽃피운 진경시대 덕분에 우리나라 회화가 중국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번 전시는 겸재의 젊은 시절 작품부터 83세에 타계할 때까지 작품 세계의 변모를 보여주는 80여점과 그에게 영향을 받은 이광서 김홍도 신윤복 등의 작품까지 모두 110여점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박 앵커) 간송미술관은 겸재와 진경산수화를 조명하는 전시를 여러 번 연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겸재와 간송미술관 사이에는 각별한 인연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고) 그렇습니다. 간송미술관은 1971년 제1회 정기전시회를 겸재 전으로 시작한 이래 이번 전시까지 모두 일곱 차례 진경시대와 겸재를 주제로 한 전시를 열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겸재의 진면목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됐고, 여기에 오기까지 두 사람의 숨은 노력이 있었습니다.
먼저 간송미술관을 세운 간송 전형필 선생 덕분에 겸재의 많은 걸작들이 흩어지지 않고 한 곳에 모일 수 있었습니다. 간송은 겸재 그림이 조선 후기 문화의 우수성을 증명할 문화유산이란 사실을 알고 집중적으로 수집했기 때문입니다. 또 간송미술관의 최완수 실장은 30여년간 겸재 연구에 매달려 위대한 화성의 면모를 샅샅이 밝혀냈습니다. `진경시대`란 표현을 정착시키는데 최 실장의 공이 큽니다.
(김 앵커) 겸재는 60대가 넘어서도 그림에 많은 변화를 시도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변모는 어떤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요.
(고) 겸재는 늘 진화를 거듭한 화가였습니다. 이번 전시에 나온 작품 중 해금강의 총석정을 그린 세 점을 비교해 보면 확연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순세살 때 그린 작품에서는 넓은 바다 물결 속에 총석정이 거의 파묻힐 듯 작게 보이지만, 일흔두살에 작품에서는 배경을 과감히 생략하고 총석정과 봉우리들을 훨씬 돋보이게 그렸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칠십대 후반 그림에서는 네 개의 봉우리를 세 개로 줄여 표현하는 등 추상화 경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인터뷰) 최완수 실장 / 간송 미술관
"그림이 남아 있는 게 36세 때 금강산 그린 그림부터 나와 잇는데 84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화필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사이에 해가 지날수록 그림의 경지가 점점 완숙해져서…"
(박 앵커) 그 밖에도 눈여겨 봐야할 작품은 어떤 것이 있나요?
(고) 겸재는 금강산을 즐겨 그렸던 만큼 금강산도를 주목할 만 합니다. 더불어 서울 인왕산의 동쪽 기슭을 그린 `청풍계`는 진경산수의 기준작으로 꼽힐 만한 작품입니다. 인왕산 특유의 잘생긴 암벽을 대담한 묵법으로 그리고 나무들은 거친 붓으로 속도감 있게 표현해 우람하고 장대한 느낌을 살려낸 걸작입니다. 개성의 박연폭포를 그린 진경산수화 `박생연`도 주목해야 합니다. 거대한 암석이 층층이 쌓여 벼랑을 이룬 절벽 아래로 시원한 물이 떨어져 내리는 박진감 넘기는 풍경이 관람객을 압도합니다. 이 밖에도 양천 현령을 지낸 겸재를 기리는 뜻에서 최근 서울 강서구 가양동에 겸재정선기념관이 문을 열었고 국립중앙박물관은 올 가을 겸재 전시를 계획 중입니다.
(박) 간송미술관 전시는 작품이 뛰어난 데다 입장료도 받지 않는다고 하니 많은 분들이 가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고 기자. 수고했습니다